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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의 세계일주/2017 아프리카

자전거 세계여행 ~2655일차 : 제노사이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by 아스팔트고구마 2019. 3. 27.

자전거 세계여행 ~2655일차 : 제노사이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2017년 6월 27일 


오늘은 키갈리를 떠나는 날이다. 

그전에 아침 일찍 꼭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 그곳으로 페달을 밟았다.

바로 키갈리 제노사이드 박물관.




르완다에 오는 여행객들은 키갈리에 오면 한번쯤은 이곳을 들른다.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말은 인종말살, 인종청소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우리에게 르완다하면 스테레오 타입으로 박혀 있는 단어, 르완다 내전.

오늘 방문한 이곳은 1959년에서 1996년까지 아프리카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벌어진 다수파 피지배계급 후투족과 소수파 지배계급 투치족의 인종 간 갈등으로 생겨난 당시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박물관이다.

이 내전을 르완다 사태라고도 부르기도 한단다. 




좀 길지만 내 개인적으로 감상이 꽤나 많이 커서, 그리고 국민들을 멍멍이와 꿀꿀이 취급하는 대다수(아니라고? 진짜?)의 정치인을 바라볼때 어떤 관점을 제공하진 않을까 싶어 좀 상세히 적어보려 한다. 

르완다에서는 수십 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질병과 기아 등으로 수백만 명이 죽었고, 특히 1994년 여름부터 불과 몇 개월 동안 국제사회의 방관 속에 100일만에 800,000에서 1,000,000명이나 죽어 나가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정치상 목적으로 특정한 인종에 대한 말살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르완다 집단학살(Rwanda genocide)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이 시작의 큰 원인이 바로 분열을 부추긴 것은 이곳을 통치하고 있던 벨기에의 정책 때문이다.

아프리카 특성상 나라마다 부족 혹은 민족의 개념이 복잡하거나 또는 단순한 곳이 있다. 

르완다와 부룬디의 경우 후투족이나 투치족 뿐만 아니라 여러부족이 다 섞여서 사는 형태를 띄고 있었다. 

그들의 민족이 구분이 없었던것은 아니었으나 마치 옆집마을 부족 사람 정도로 여기면서 문화, 언어, 풍습등을 공유하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벨기에는 식민지 정책을 원활히 하려고 이상한 기준을 가지고 분열을 일으키게 됐으니...




<당시 르완다의 주요민족이던, 투치, 후투, 트와 세 부족>

그 구분 기준이 키, 콧대 높이, 재산 등으로 부족을 구분했다고 한다. 

이게 말이되냐? 

오징어가 머리에 왁스 바르고 2:8 가르마 타는 소리하고 있네.




실제로 박물관 내에는 보면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머리 크기와 키, 코 높이를 재는 사진이 있는데 정말.... 역겹다. 

조선시대 말에도 옆 섬나라 애들이 저랬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도쿄 박람회에 전시를 했다지?

아, C8.  저 개새X들. 




여기다 영국인 탐험가 스피크라는 사람이 르완다 부룬디의 탐험 후 대다수가 상위층에 속한 투치족을 키도 크고 정치적으로도 우수하다고  한 이야기가 유럽에 퍼지면서 투치족은 우월, 후투족 및 트와족 같은 부족은 열등한 부족이란 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후의 식민통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19세기 독일이 부룬디와 르완다의 갈등을 틈타 이곳을 통치하였다가 1차대전 패전후 벨기에가 위임 통치를 했다.

그 통치 방식이 상당히 폭력적이고 가혹했다고 전해진다. 

벨기에는 투치족 출신 왕을 내세워 후투족장을 폐위하고 후투 왕국을 해체했는데 소수상류인 투치족과 다수한 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으로 두 민족간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을 지배를 했고 각종 강제노동과 과중한 세금등이 투치족의 이름으로 실시되었는데 투치족은 반발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 결과 후투족은 당연히 짐을 떠안아야하하는 상황. 후투족 젊음이들이 높은 세금과 노동, 배고픔에 증오가 쌓여가면서 투치족이 쌓은 기득권에 슬슬 반기를 들 조짐을 보였다.

1959년 쫓겨난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당시 국왕 키겔리 5세는 망명후 1961년 1월 르완다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독립후 투치족이 외국으로 쫓겨났고 1963년 이웃나라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공격하여 이에 대한 후투족의 복수로 르완다의 투치족이 피해를 입었다. 


각 나라에서 이런저런 살륙이 벌어지면서 르완다에서 후투족의 쿠데타로 정권일 빼앗긴 투치족은 지도자들이 살해되고 남은 투치족은 우간다로 가서 1987년 르완다애국전선을 결성했다. 

1990년 우간다의 지원 + 투치족과 그 난민들 vs 르완다 애국전선 + 프랑스와 프랑코포니(불어쓰는 국가들의 모임) 아프리카의 지원

이렇게 대결 양상이 되어버렸다. 


엄청난 인구수가 살륙을 하면서 광기의 상황이 되어가니 부족별 지도층과 사람들 사이에서는 언쟁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당연히 벌어진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머리를 굴리는 세력들은 꼭 있다. 우리의 일제 앞잡이를 자처하면서 더 열심히 뛰는 애들처럼. 

여기도 있~나베.... 헐~

국내에 인종간 긴장이 심화되면서 1980년대 커피 가격 폭락으로 경제가 파탄나자 후투 기득권층이 후투족의 불만을 투치족에게 돌리고자 "투치족이 후투족을 노예로 만들려고 하니 우리는 무조건 저항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를 퍼트렸다고 한다.

그 기득권층은 또 한편으로 계속되는 갈등과 반군을 이용하면서 정치세력을 만들고 나라를 통치하려고 들면서 서로간에 죽고 죽이는 과정이 계속 일어났다. 

중간중간 벌어지는 화합정책이 있긴 했지만 극단주의적 사람들과 이 혼란한 틈에도 기득권을 잡고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내심 싸우길 원했기 때문에 큰 결단으로 한 그 화합정책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1994년 4월 6일에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뱌리마나, 부룬디 태올여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두 사람이 비행기 요격 사고로 사망해버렸고 이 암살 사건으로 르완다와 부룬디의 분위기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버렸다. (후에 이것은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밝혀짐)




1994년...

불과 100일만에 약 80만명이 인종 학살을 당한 사건으로 그 규모와 잔혹성이 유태인 대학살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인종학살로 꼽힌다. 

대통령이 암살당한 4월 6일부터 7월 중순까지 최소 80만명인데 르완다 인구의 20% 로도 전해진다.


친절했던 이웃집 아저씨와 학교 선생님, 목사님이 하루아침에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 

저는 죽어라고 계속 달렸어요. 그들이 계속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어요.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고요.

- 르완다 대학살 생존자 인터뷰 中






"처음에는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언제고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죽더라도 잔인하게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칼에 맞아 죽느니 차라리 총에 맞아 죽기를 바라지요. 

돈을 주고 죽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대게 총으로 죽여 달라고 말할 겁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오히려 예삿일이다 보니 절로 체념이 되더군요. 

싸울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습니다. 키갈리 이웃 도시인 카시루에서만 투치족 4,000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한데 모여 앉으라고 말하더군요. 수류탄을 터뜨려 한꺼번에 살해할 생각이었던 게지요. 사람들은 모여 앉았습니다."

- 당시 대학살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로랑 은콩골리가 필립 고레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


서로 죽이고 죽였다. 

처음엔 총, 수류탄으로 죽이다가 나중엔 그 방법이 더 원시적인 칼, 죽창, 돌 등을 쓰면서 더 잔인하고 악독하게 서로를 죽였다. 

아무 것도 뭐가 뭔지 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자기가 왜 죽는지도 모른채, 그냥 살육을 당했다. 

스스로도 모르게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받아 스스로에게 증오감을 키워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후에 최악으로 치달아가는 자기 부족내 분위기와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르완다 애국전선은 1998년 7월에 전투 중지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건 르완다에서만의 이야기다. 

르완다는 후투가 투치를 일방적으로 학살했지만 인근국가인 우간다, 콩코민주공화국까지도 그 범위가 넓게 퍼져있다. 

부룬디에서는 후투 극단주의자들의 학살을 시작으로 투치족 군대가 보복하는 일이 벌어졌다. 

1970년대 투치족 군부에 의해 후투족 20만명이 학살이 되었는데, 20년이 지나 다시 25만명 이상이 다시 서로를 학살하며 죽였다. 

이 두 학살을 합하면 1주일내에 10만명 이상이 학살당한것으로 캄보디아 킬링필드 학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의 파키스탄인들의 학살에 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번째의 학살숫자라고 전해진다.


내부에는 글과 함께 생존자의 영상이 남아있는데 내가 생각했던것 보다 훨씬 더 중압감이 커서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약간은 좀 엇나간 이야기도 해야겠다.

이 모든 것이 벨기에의 헛짓거리에 의해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난 이 뒷 배경이 벨기에라는 것에 많이 놀랐다. 

그래서 참고로 한가지 우리가 별로 알지 못하는 벨기에에 대한 사실을 하나 더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약 한달 전 탄자니아 잔지바르에 있는 노예 박물관에서 본 것인데, 

2019/03/06 - [Journey/Cycling Report] - 자전거 세계여행 ~2605일차 : 잔지바르, 노예 소년의 눈빛이 내게 건넨 것

이곳 제노사이드 박물관에서도 학살 내용에 맥락을 같이 하는 엄청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어서 기억이나 언급을 하려고 한다.


그 주인공은 무려 벨기에의 국왕이다! 

우리나라도 19세기~20세기로 넘어오면서 세계 열강은 식민지 쟁탈에 열을 올린다.

그때 당시의 벨기에 국왕은 레오폴드 2세.(레오폴-Leopold)




별명이 무려 '콩코의 학살자'다. 

여러가지 잔인한 것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알지만 우리가 체감하는 것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다.

19세기의 증거가 지금 남아있는데...


당시의 콩고는 지리적인 특성과 기후로 많은 양의 고무를 생산하는 국가였고 통치국인 벨기에는 그 무역으로 7배 이상의 차익을 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방법을 써가며 생산량을 부추겼고 그 극대화를 위해서 그야말로 엽기적인 방법을 고안해냈으니...

바로 손목 자르기.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처음엔 매질로 목숨을 빼앗거나 불구를 만들었으나 후에는 손목을 잘라버리고 할당량을 가족, 옆 사람, 마을단위로 전가 시켰다.

그렇게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어린아이까지 동원해놓고 손목을 잘랐다. 

당시에 죽은 사람들만 최소 800~1000만명! 


그래놓고 나중에 자국과 국내의 비난을 받자 부랴부랴 분칠하기 작업에 나서면서 그가 한일을 미화했다. 

1909년에 그가 죽고 나서 빠르게 잊혀졌으나 1998년, 지금으로 부터 불과 20년전에 이 이야기가 책과 다른 저작물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전 세계에 다시 널리 알려졌다. 






역사적으로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으로 히틀러,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 캄보디아 폴폿, 20세기 중반의 중국 모택동 등을 말하지만 우리에겐 덜 알려진 잔인한 것들이 너무너무 많다.

우리 외의 것에 그리고 편파적임이 없음을 누가 부인을 하겠나. 

과거 대영제국이라는 이름으로의 영국과 현재의 미국 이런데는 시간과 대상만 바뀌었지 그 방식은 똑같다.

나 또한 이런 뻔한 소리를 지금 한다. 앞으로도 이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다. 

그래도 해야한다. 

안변한다고 그냥 있는게 아니라 우리가 겪는 감기처럼 영원히 안 없어지지만 있으면 해로운 그것을 계속 다루어야 한다. 


르완다 대학살에 대한 위의 언급은 단지 일부일 뿐이다. 

이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생생하게 보고 싶다면, 영화 '호텔 르완다'를 보시길 추천드린다.




나오면서 진심... 그리고 말할수 없을 정도로 불편함이 생겼다.  

봉합하려는 과정에서 저렇게 훼방을 놓고 그 가운데서 기득권을 얻으려는 놈들 때문에 상관없는 사람들은 살륙되고 또 증오로 총을 들어야했다. 



나는 인간이 저렇게 악할 수도 있음을 안다.

그걸 안다고 해서 저런 것을 그냥 용납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전에도 말했듯이 개새X들에게는 욕부터 해야한다. 

지금에도 참 조용히도 숨어있는 정치권력, 언론권력들은 날뛴다. 



우리가 처음부터 힘을 가져서 외부로부터 애초에 휘둘림을 안 당했다면, 

우리안의 건강한 마인드와 서로의 민감함으로 내부의 악한 기득권을 빨리 쳐내버렸다면 어땠을까?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말이 백만번 옳다. (신채호 선생님이란 말도 또 다른 사람이라는 있지만..-_-;)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제노사이드 박물관에서 바라본 뷰.

따땃하고 평화롭다. 

안과 밖.

이렇게 다를까.....?




이 키갈리의 제노사이드 박물관은 우리나라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일본 애들이 이런거 잘하든데, 의미가 좀 있네. ^^ 


집중해서 봤더니 힘이 좀 많이 빠진다. 

얼른 돌아가서 짐싸고 출발하자! 




2017년 6월 26일 오전까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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